KOA - 북송문제・납치문제・북한인권문제개선NGO 「모두 모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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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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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가와사키 에이코」프로필

성장배경
1942년 7월 11일 일본 교토에서 父는 경남출신 朴鐘鎬, 母는 전남출신 鄭正任 사이에서 재일교포 2세로 출생했다. 일본 패전 후 일본에 남은 재일교포들은 예외없이 극심한 가난에 찌들려 불안정한 나날의 연속이었으며 가와사키의 집안은 그런 와중에도 그나마 유난히 화목한 가족관계를 유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으며 항상 부친은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온 것에 대해 처음으로 거짓말이라고 반발했다. 어느날 가정을 방문한 『조총련』활동가의 권유로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입학시험을 거쳐 최우수 성적으로 입학, 당시 「특대생」(特待生)으로서 수업료 등 일체 무료로 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들의 북한 귀국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어 『조총련』은 매일 대회와 집회를 반복하여 개최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정부도 국회와 지방 의회까지 재일교포 북송에 대해 찬성 의결하고, 자유당ㆍ사회당ㆍ일본공산당 등 각 정당과 日敎組, 全勞連, 부인단체, 청단단체 등도 활동에 적극 참가하여 마치 일본 전체가 연일 축제로 떠들썩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이윽고 日北 양국 적십자사 사이에 귀국협정이 조인되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우는 북송사업이 시작되었다.

지옥같은 북한에서의 생활
1960년 고교 3학년인 17살 때 혼자서 북송선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하늘이 놀랄 정도였다. 『조총련』은 모든 자유가 보장된다고 確言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인권의 불모지였다. 북한 정부의 정치에 찬성도 협력도 할 수 없었기에 이미 결심한 것은 대학 진학을 공학계열로 변경하고 그들로부터 생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절 글자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노동당원이 되지 않으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노동당 강령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노동당원도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 이외 누구에게 들켜도 목숨이 걸린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은둔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참가는 안하더라도 사회주의란 것을 확실히 봐둬야 하므로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관심을 가지고 어딘가 출구가 있지 않을까라고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구차하게 연명하기 위하여 권력에 아첨하는 모습을 보고 “나 혼자서라도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도 생명을 끝내는 날까지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자”라고 결심하고 살아갔다.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40여년이었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혹시 이것을 기회로 이곳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한 가닥의 희망에 의지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조선시대 봉건사회에서 직접 일제 식민지로 변하고 소련에 의해 김일성에게 맡겨져 단 한 번도 진실된 의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맛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인간세상이라는 것은 지배하는 것과 지배당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어 김일성부터 김정일로의 권력 세습이 행해져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김일성 사후 대량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 북한은 세상의 지옥으로 변했다. “이미 이 이상 이 땅에 머무르는 의미도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국경을 넘었다. “이 땅은 외부로부터 영향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고 해외, 특히 일본 사람들에게 이 땅의 현상을 알리고 그 후에 무언가 협력을 얻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탈북 이후 일본 정착
일본으로 돌아와 책을 읽고 일본어를 모르는 탈북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은행계좌 개설, 교통기관 이용방법, 병원ㆍ쇼핑 등등 일본에서 생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협력활동을 하고 여러 군데 초대를 받아 북한의 현상을 전하는 일에도 관계해 왔다. 그 사이 본인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해지는 것이 두려워 본명을 밝히지 않고 필명으로 책도 출간하고 그 이름으로 생활해 왔다. 북한을 벗어난지 벌써 10년, 일본으로 돌아온지 9년이 되지만 아직까지도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만약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두 번다시 만나지 못하고 인생을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가 몰려왔다. “지금부터 더 이상 도망쳐 숨는 것을 그만두자”라고 내가 음지의 존재로 있으면 사람들 마음의 진수(眞髓)에 호소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상대의 마음을 울리게 할 수도 없다. 지금부터는 본인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일본인처(日本人妻)와 북송자 문제 해결에 협력을 구하는 사업에 적극 호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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